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데이비드 로빈슨 (문단 편집) === 데뷔 이전 === 로빈슨은 군인 집안의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도 [[미합중국 해군]]에서 복무했고, 그래서 가족들은 아버지가 전역할 때까지 이곳 저곳을 옮겨다니며 살아야했고 아버지가 전역한 이후에야 버지니아 주에 정착했다. 로빈슨은 고등학교 때 타고난 운동신경으로 여러 스포츠를 했지만 유독 농구만 하지 않았는데, 3학년까지(미 고등학교는 4년제다) 키가 5피트9인치(175cm)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4학년이 되자 갑자기 6피트6인치(198cm)로 성장했다. 당시까지 그는 조직화된 농구를 전혀 해본 경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그를 팀에 합류시켰고, 뒤늦게 시작했음에도 그의 학교가 속한 지역(district)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가 됐지만 그 정도로 대학 팀들의 이목을 끌기는 무리였다. 결국 로빈슨은 [[SAT]] 시험에 응시, 1,320점을[* 2021년 현재에는 사관학교 가기에 1320점은 조금 부족한 것 아니냐는 반응이 있을 수 있겠지만, 80년대에는 미국 학생들이 지금처럼 SAT에 목숨걸지 않았기에 1320점은 아이비리그에 들어가기 충분한 점수였다. [[https://www.educationnext.org/sat-scores-comparison-over-time-1985-2016/|참조]].] 받고 [[미국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한다. 전공은 [[수학]]이었다고.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a842432322ffacca6685b5b29af5c213.jpg]] 4학년 생도 시절의 모습. 그런데 로빈슨의 [[성장판]]은 아직도 열려있었다. 신장제한[* 해군에서 군생활을 해보거나 군함에 타본 사람은 알겠지만 군함의 격벽구조상 키가 지나치게 크면 언제든 철벽에 머리를 부딪힐 위험이 있다.] 때문에 겨우 해군사관학교 입학이 허락된[* 사실 로빈슨은 입학이 결정된 이후 고등학교 졸업반 시절에 비해 1인치가 더 자라 이미 198cm 신장제한을 넘은 상태였다. 그러나 그의 나이, 불과 1년전에 급성장을 겪은 걸 생각하면 더 이상의 큰 성장은 없을 것이라고 여겨져 입학이 허가된 상태였다. 그런데 마치 뒤통수치듯이 2학년이 끝날 무렵 여기서 10cm가 넘게 더 큰 것.] 로빈슨은 거기서 또 키가 미친듯이 자라서 무려 7피트(213cm)의 거인이 되었다. 이때문에 해군사관학교장인 찰스 라슨 해군 [[소장(계급)|소장]]과의 면담까지 가는 등, 2학년도 못마치고 신체검사 걸려서 퇴교되나 싶었지만 존 레만 [[해군부]] 장관[* [[해군참모총장]]보다 위에 있는 [[문민]]이다.]이 그의 이야기를 접했고, 함정 근무에 부적합한 그의 신체 조건을 감안하여 육상에서만 근무하는 [[미합중국 해군/공병|해군 공병]] [[병과]](Civil Engineer Corps) [[장교]]로 임관하는 조건으로 해사에 계속 재학할 수 있는 특례를 인정받았다. 공병 [[소위]]로 임관한 뒤 [[조지아주]] 킹스 베이의 해군 [[잠수함]] 기지에서 2년 복무 후 [[중위]]로 예편했다. 해사 출신 자원은 병과별로 차이가 있으나 최소 5년의 의무 복무를 해야 하는데, 그는 여기서도 특례를 인정받은 것이다. 어쨌건 7피트에 달하는 거인임에도 운동능력을 전혀 잃지 않은 축복받은 신체 덕에 재학 4년 동안 폴 에반스[* 1945년 1월 31일생. 이타카 대학교 시절 농구부와 미식축구부에서 뛰었으며 졸업 후 1973년 NCAA 디비전3 소속인 세인트 로렌스 대학교에서 감독으로 데뷔해 임기 7년 동안 디비전3 전국대회에 6번 진출시켜 수완을 보였고, 1980년 미국해군사관학교로 전근가서 임기 6년 간 전국대회 진출 2회, 특히 1985-86 시즌에는 8강까지 가는 기적을 선보이며 로빈슨 외에 후술할 덕 보이칙, 브라이언 그레고리 등을 육성했다. 1986년부터 피츠버그 대학교로 옮겨 임기 8년 동안 찰스 스미스, 제롬 레인, 에릭 모블리 등을 발굴/육성했으며, 지도자 생활 내내 '파워 오펜스'를 주로 구사했다. 지도자 일선에서 은퇴한 후에는 한동안 부동산 사업에 전념해왔다.([[https://www.facebook.com/paul.evans.71868964|개인 페이스북]], [[https://www.washingtonpost.com/archive/sports/2005/02/12/navy-coach-lange-has-an-anchor-in-evans/8f06b742-0036-467b-a91d-066f9a3abf25/|2005년 워싱턴 포스트 기사]])]와 피트 허먼 감독의 지도 하에 덕 보이칙(Doug Wojcik, 전 털사 대학교 감독) 등 선배들과 함께 뛰며 평균 21.0득점, 10.3리바운드를 기록하고, 1986년 [[3월의 광란]]에서는 보이칙, 편입생 브라이언 그레고리(전 사우스 플로리다 대학교 감독) 등과 함께 팀 역사상 유일한 엘리트 8[* [[브라운 대학교]], '''시라큐스 대학교''', 클리블랜드 주립대학교를 차례로 꺾고 8강전에서 조니 도킨스, 토미 아마커(현 하버드 대학교 감독), 퀸 스나이더(현 애틀랜타 호크스 감독), 제이 빌라스(현 ESPN 해설위원) 등이 포진한 강호 듀크대랑 맞붙었으나, 결국 패했다.]으로 팀을 이끄는 등 전미 최고의 [[센터(농구)|센터]] 유망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미국해군사관학교]]는 NCAA에서는 [[미국육군사관학교]]와의 정기전 정도 외엔 주목받을 일이 없다. [[대학풋볼]]의 경우 [[로저 스타우벅]]이라는 [[명예의 전당]] [[쿼터백]]이 있지만 농구는 그런 인물이 그동안 없었고, 풋볼보다 투자가 낮은 농구에 제대로 학생들이 올일이 없었던 그런 아마추어급 팀을 로빈슨 본인이 하드캐리했다. 그렇게 8강까지 올랐다는 점을 생각하면 로빈슨이 제대로 된 농구부에서 뛰었다면 NCAA를 얼마나 씹어먹었을지... 재학중 해사 생도나 해군 관계자 외에 해사의 농구 경기를 보러 온 사람들은 순전히 로빈슨 개인을 보기 위해 몰려다닌 스카우트들이었다고.] 그래도 로빈슨은 이 4년간의 활약으로 NBA 팀들의 지대한 관심을 받게 되었고, 1987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샌안토니오 스퍼스]]에 지명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